영화 한 편이 쏘아 올린 작은 공
영화 한 편이 쏘아 올린 작은 공은 여러 곳에 가 닿으며 저에게 다채로운 순간들을 경험하게 해 주었습니다. 일단 영화가 너무 좋았고, 윤슬처럼 빛나는 네 자매의 모든 순간들이 아름다웠습니다. 영화를 본 후에야 원작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망설임 없이 요시다 아키미의 만화 <바닷마을 다이어리> 전권(총 9권)을 구매했습니다. 만화책을 한 권 한 권 읽다 보니 영화와 만화의 배경이 되는 가마쿠라에 가보고 싶어졌습니다. 네 자매가 맛있게 먹던 시라스동(잔멸치덮밥)의 맛, 후타와 스즈가 함께 찾은 신사인 고토쿠인의 대불 속 풍경, 작은할머니 앞에서 사치가 맛있게 먹던 치카라모찌야(힘떡)의 식감은 어떨까 궁금했습니다. 결국 참지 못하고 도쿄행 비행기를 끊었습니다. 가마쿠라에서의 1박 2일은 짧았지만,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정취를 한껏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영화에서 만화로, 만화에서 여행으로, 여행에서 글로 이어지는 저의 감상문을 즐겁게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저와 같은 즐거운 여정이 펼쳐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시작해 보겠습니다.
한결같은 믿음으로 서로를 보듬고 또 보듬는
푸른 나무들로 둘러싸인 오래된 이층 집에는 세 자매가 살고 있습니다. 세 자매는 첫 등장부터 닮은 듯 또 다른 캐릭터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에 어깨가 무거운 첫째 사치, 남자와 술을 좋아하는 호방한 둘째 요시노, 엉뚱하면서도 쾌활한 셋째 치카. 세 자매는 15년째 부모님 없이 셋이서만 살고 있습니다. 영화는 아버지의 부고 소식으로 시작됩니다. 세 자매의 아버지는 아내와 세 자매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렸고, 그 사이에 태어난 딸이 있었습니다. 그 딸은 나중에 등장하는 넷째 스즈입니다. 아버지는 사별 후 스즈를 데리고 다른 여자와 재혼했고, 야마가타에 정착해 살다가 병환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 겁니다. 무책임한 아버지가 못마땅한 사치는 야간근무를 핑계로 대며 아버지의 장례식에 두 동생만 보냅니다. 야마가타로 향하는 기차에 오른 요시노와 치카. 아버지가 떠난 당시에 치카는 너무 어렸기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고, 요시노는 엄마와 늘 싸우기만 하던 아버지의 모습만 기억에 남아 있고, 사치는 아빠와 다투고 마음 상한 엄마를 달래주던 기억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세 자매는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와 기억 또한 제각각 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안됩니다.
어른들이 할 일입니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할까요?
인사만 하면 되죠?
야마가타에 도착하니 배다른 동생인 스즈가 마중 나와 있었습니다. 보통의 중학생으로 보이지 않는 어른스러운 스즈의 모습에 치카와 요시노는 놀랍니다. 만화에서는 요시노가 온천을 즐기며 고주망태가 되어 다음날 열리는 장례식장에서 숙취로 힘들어하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그 장면은 건너뛰고 곧바로 장례식장에 참석한 치카와 요시노의 모습을 비춥니다. 그리고 장례식 시작 전 갑자기 나타난 사치의 모습이 보입니다. 근무 때문에 못 온다던 사치의 등장에 두 자매는 놀랍니다. 사치는 스즈와 (아버지의 세 번째 부인인) 요코와 처음 마주합니다. 요코는 울기만 하며 대책 없이 조문객 인사를 스즈에게 넘기려고 합니다. 그 모습을 보고 참을 수 없던 사치는 "그건 어른의 일"이라며 막아섭니다. 요코는 그제야 울며 겨자 먹기로 조문객 인사를 본인이 하게 됩니다. 여기저기 삐걱대던 장례식이 끝나고, 세 자매는 가마쿠라로 돌아가기 위해 기차역에 다시 돌아옵니다. 세 자매의 등 뒤에서 그들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꽤 먼 거리를 달려온 것 같은 스즈는 그들에게 아버지의 서랍 속에 있던 가족사진을 전해주고 싶었습니다. 가마쿠라에서 함께 불꽃놀이를 하던 사진을 보며 세 자매는 잠시 추억에 잠깁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려는 스즈에게 사치는 이 동네에서 제일 좋아하는 곳이 어딘지 묻습니다. 스즈는 경치 좋은 언덕의 정상으로 세 자매를 인도합니다. 스즈가 아버지와 함께 자주 왔다는 그곳은 세 자매가 사는 가마쿠라를 많이 닮았습니다. 사치는 처음 본 그 순간부터 스즈가 자신들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걸 직감했습니다. 대책 없는 요코 대신 아픈 아버지를 끝까지 정성껏 돌보았고, 아버지를 누구보다 사랑했던 사람이 스즈였다는 것을 사치는 알고 있었습니다. 가마쿠라로 돌아가는 기차 위에서 사치는 스즈에게 우리와 함께 살자고 제안합니다. 스즈는 아주 잠깐의 망설임 뒤에 흔쾌히 응합니다. 가슴이 벅차오른 스즈는 세 자매를 싣고 가마쿠라로 떠나는 기차를 따라 힘껏 달립니다.
스즈,
가마쿠라에 올래 우리랑 같이 살래?
넷이서.
우리 집 많이 낡았지만 넓어.
다 일하니까 너 하나 정도 먹여 살릴 수 있어.
결국 스즈는 세 자매가 사는 이층 집으로 이사를 오게 됩니다. 스즈는 큰언니가 쓰던 방을 쓰게 되고, 삶은 국수와 가지튀김으로 함께 점심을 먹습니다. 세 자매는 스즈를 따뜻하게 받아들이고, 스즈도 그들에게 자연스럽게 스며듭니다. 새 학교로 전학 온 스즈에게 친구들도 다정하게 대하고, 자연스레 축구부 입단 지원서를 받게 됩니다. 물론 주변의 걱정이 있기도 합니다. 이모할머니는 사치를 불러놓고, 스즈를 집으로 데려온 것을 걱정하며 잔소리를 쏟아냅니다. 하지만 사치는 스즈를 데려온 일은 결코 후회하지 않습니다. 사치의 기대에 부응하듯 스즈는 입단한 축구부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친구들과도 잘 지냅니다. 이모할머니를 제외한 (스즈를 둘러싼) 어른들 모두가 스즈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스즈는 그런 그들의 애정을 먹으며 하루하루 쑥쑥 자라납니다.
사치에게는 동생들에게 차마 말할 수 없는 애인 시이나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그랬듯, 본인도 유부남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의 아내는 마음의 병을 앓고 있고, 아내와 곧 이혼할 사이라고는 해도 기약할 수 없는 약속에 사치는 언제나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좋아하는 마음을 끊기 어려운 사치는 그로 인해 점점 더 외로움을 겪습니다. 시이나는 사치의 고민을 잘 들어주는 다정한 사람이지만, 예정된 데이트 일정은 그의 아내 문제로 갑자기 취소해야 합니다. 사치는 부부의 연을 쉽게 끊을 수 없는 그를 원망해 보기도 하고, 그에게 젓가락을 사주는 일조차도 망설입니다. 불안한 나날의 연속이던 어느 날, 설상가상으로 오랜만에 (재혼해서 멀리 떠난) 엄마가 찾아옵니다. 세 자매를 떠난 지 14년이나 되었고, 외할머니의 기일에도 오지 않는 그런 엄마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찾아와 집을 파는 게 어떤지 묻는 엄마는 역시 사치의 분노를 촉발시킵니다. 둘은 크게 다투고, 바람난 아빠를 비난하는 엄마의 말을 스즈가 듣게 됩니다. 스즈는 마음이 어려워지고, 언니들에게 더욱 미안한 마음이 커져 갑니다. 부인 있는 남자를 사랑한 엄마에 대해 미안하다며 고백하는 스즈를 보며 사치는 마음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사치는 그것이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사치는 스즈에게 누구의 잘못도, 누구의 탓도 아니라 말하지만, 사치는 본인의 상황을 직시하며 더욱 마음이 심란해집니다.
사치는 자신을 온전히 사랑해주지 않는 애인 시이나가 밉고,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 자식들을 버리고 떠난 아빠도 밉고, 아빠가 떠나자 곧바로 떠나버린 엄마도 밉습니다. 스즈 또한 언니들의 엄마를 보고는 마주하고 싶지 않던 상황을 겪게 되며 아빠도 밉고, 엄마도 밉고, 스스로도 미워집니다. 그러면서 과연 자신이 언니들과 함께 해도 되는 것인지 자문하게 되고, 언니들에 대한 미안함이 점점 커져 갑니다. 언니들은 그런 스즈를 한결같은 믿음으로 보듬고 또 보듬습니다. 시간은 천천히 스즈의 마음을 녹이고, 시나브로 열리게 됩니다. 더불어 평행선만 달리던 사치와 엄마의 사이도 서로 안쪽으로 조금씩 향하게 됩니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 엄마는 네 자매에게 선물을 건네고, 사치는 할머니 산소에 가려던 엄마와 동행합니다. 할머니가 담근 마지막 매실주를 전하는 사치는 엄마와의 간극이 조금 줄어들었다는 사실에 안도합니다. 한편, 미국으로 떠나는 시이나는 사치에게 함께 가자고 제안하지만, 사치는 결국 이별을 택합니다. 호스피스 병동일을 맡게 된 사치는 이 일에 몰두하기로, 자신에게 온 스즈를 더욱 보듬어주기로. 어린 시절을 잃어버린 스즈를 걱정하는 사치에게 시이나는 당신도 스즈와 닮았다고 말합니다. 짧은 위로의 말을 건네며 떠나는 시이나를 보며 사치는 그렇게 한 걸음을 내딛습니다. 그 누구도 판단할 수 없는 저마다의 마음은 결코 평면적일 수 없고, 단편적으로 이해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네 자매에게는 각자 추억의 음식들이 있습니다. 사치는 엄마가 만들어 준 해산물 카레, 요시노는 니노미야 사장님이 만들어 준 전갱이 튀김, 치카는 할머니가 만들어 준 어묵 카레 그리고 스즈에게는 아빠가 만들어 준 잔멸치 덮밥과 잔멸치 토스트. 스즈는 언니들과 함께 잔멸치 덮밥을 먹을 때에는 처음 먹는 거라 거짓말을 합니다. 스즈는 언니들을 떠나 자신과 보낸 아버지와의 시간을 이야기하는 것이 조심스러웠습니다. 혹여 언니들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까요. 아니면, 언니들이 아닌 자신과만 시간을 함께 해서 미안했기 때문일까요. 하지만 스즈는 얼마 못 가 치카에게 그 사실을 털어놓습니다. 스즈에게 잔멸치 덮밥은 아버지의 맛이었습니다. 스즈보다 아버지와의 추억이 별로 없는 치카는 그런 스즈에게 아버지 얘기를 들려달라고 합니다. 친구들과 함께 찾은 카페에서 먹은 잔멸치 토스트를 맛보고, 그곳에서의 아버지 이야기가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과거에만 머무르진 않습니다. 스즈는 사치와 함께 해산물 카레를 만들고, 요시노 언니가 좋아하는 전갱이 튀김을 맛보고 좋아하게 되고, 치카가 만든 어묵 카레를 함께 나눠 먹게 됩니다. 그리고 집 앞에 자란 가득 열린 매실을 따서 함께 매실주를 담그며 새로운 추억들을 만들어 갑니다.
영화를 보아야만 느낄 수 있는 감동
이야기의 흐름에 따라 장면 장면을 순서대로 자세히 설명하다 보니 생각보다 긴 글이 되었습니다. 이 문장까지 오기까지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래서 장황한 소개글을 중간에 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영화의 모든 내용을 소개하다가는 오히려 영화에서 만날 수 있는 감동을 조금 방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각본집으로도 다시 읽어 보면서 이 영화는 한 장면 한 장면이 아름답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순간들이 참 많습니다. 후타의 자전거를 타고 벚꽃놀이를 하는 스즈의 얼굴, 네 자매가 유카타를 입고 불꽃놀이를 하는 풍경, 스즈가 하나하나 따는 초록 매실의 싱그러움. 영화를 보아야만 느낄 수 있는 감동이 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제가 느꼈던 그 감동을 누리시면 좋겠습니다. 2018년 2월 가마쿠라에 다녀오면서 끄적였던 기록을 나누며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2018년 2월, 가마쿠라에서]
숙소에 짐을 풀고 밖을 나섰다.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하코네의 케이블카와 유람선의 발도 묶어버린 바람은 가마쿠라에도 찾아왔다. 하지만 바람에 질 수 없었다. 가마쿠라에 온 이유가 잔멸치덮밥이었기 때문에 '분사쇼쿠도'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다. '분사쇼쿠도'는 <바닷마을 다이어리>에서 스즈의 축구부 입단을 축하하며 부원들이 모여 식사를 하던 곳이었고, 주인공 네 자매의 단골 식당이기도 했다. 가게 문을 지키는 고양이와 눈을 잠시 맞추고,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아 잔멸치 덮밥 하나를 주문했다. 식당 내부를 구석구석 찬찬히 둘러보는데, 영화 속 장면 그대로여서 반갑고 고마웠다. 잔멸치 덮밥이 나왔고, 수북이 쌓인 신선한 멸치들이 반짝반짝 빛났다.
밥심으로 든든하게 채우고,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이야기를 따라 걷고 또 걸었다. 거센 바람을 뚫고, 에노시마 벤텐교, 고쿠라쿠지역 승강장, 치카라모치야의 힘떡, 가마쿠라고코마에역의 철길, 고토쿠인 대불상의 빈 속까지. 어둑어둑해진 밤이 오고 나서야 숙소로 돌아올 수 있었다. 저녁을 먹었지만, 괜히 아쉬운 마음에 컵라면을 하나 사들고. 낮에 못 본 (에어비앤비) 주인 할머니가 있었다. 컵라면에 넣을 뜨거운 물을 챙기고, 낮에 마신 복숭아 홍차를 또 내어주었다. 나는 포장해 온 치카라모찌(힘떡)를 꺼내 놓았다. 식탁에 둘러앉은 우리는 서로의 언어가 달라도 꽤 긴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그저 귀 기울여 듣는 마음만으로도 즐거운 밤이었다.
잔멸치 덮밥이 나왔고,
수북이 쌓인 신선한 멸치들이
반짝반짝 빛났다.
▷영화정보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 각본: 고레에다 히로카즈 / 원작 : 요시다 아키미의 <바닷마을 다이어리> / 제작사: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 제작위원회, 후지테레비, 쇼가쿠칸, 도호, GAGA / 배급사: 도호, GAGA, 티캐스트 / 개봉일: 2015.12.17 / 러닝타임: 127분 / 배우: 아야세 하루카, 나가사와 마사미, 카호, 히로세 스즈 / 장르: 드라마
▶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은 웨이브(단품구매), 유플러스 모바일TV(스트리밍), 쿠팡플레이(단품구매), 왓챠(스트리밍)를 통해서 다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