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윤희에게: 더없이 아름다운 최고의 퀴어 영화

by oneulbreakfast 2025. 6. 8.

출처: 네이버영화 - 포토 - 포스터

 

장면 하나하나 허투루 볼 수 없는 오늘의 영화

 
  흰 눈이 내리는 추운 겨울이 오면 떠오르는 영화 두 편이 있습니다. 이와이 슌지 감독의 <러브레터>와 임대형 감독의 <윤희에게>입니다. 신기하게도 두 영화 모두 오타루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두 영화 속 눈이 푹푹 나리는 장면을 멍하니 보고 있노라면, 한 겨울의 중심에 서 있는 기분에 잠깁니다. 하얗게 눈 덮인 풍경은 뜨거운 말들을 가득 삼켜버린 고요의 심상을 떠올리게 합니다. 겨울의 하얀 풍경은 두 영화의 주인공을 꼭 닮았습니다. 오늘 소개하는 영화 <윤희에게>의 주인공 윤희. 그의 표정, 눈빛, 시선, 말투, 한숨, 몸짓 하나하나는 그 어떤 대사보다 더 많은 말을 하고, 플래시백으로 담을 수 없는 지난 시간들을 짐작케 합니다. 장면 하나하나 허투루 볼 수 없는 오늘의 영화, <윤희에게>를 소개합니다.
 
  영화는 치토세선 오타루행 열차 내부에서 시작합니다. 차창으로 흰 눈에 뒤덮인 거리와 건물들이 보이고, 어느새 흰 거품으로 넘실대는 바다가 끝없이 펼쳐집니다. 첫 장면은 나중에 다시 등장하게 되고, 그 열차를 탈 사람이 누구인지, 어떤 마음으로 탔을지 미리 상상해 보면 더욱 즐거운 관람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무튼 모든 사건의 발단은 부치지 못한 편지 한 장이 쏘아 올립니다. 오타루에 사는 쥰은 한국에 사는 윤희에게 쓴 편지를 부치지 못한 채 책상 위에 두었습니다. 그 편지를 본 마사코 고모는 쥰 몰래 우체통에 넣게 되고, 윤희의 딸 새봄이 그 편지를 먼저 읽게 됩니다. 
 

윤희에게.
잘 지내니?
오랫동안 이렇게 묻고 싶었어.
너는 나를 잊었을 수도 있겠지.
벌써 20년이 지났으니까.
갑자기 너한테 내 소식을 전하고 싶었나봐.
살다 보면 그럴 때가 있지 않니.
뭐든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질 때가.

 
 

언젠가 내 딸한테 네 얘기를 할 수 있을까

 
  윤희는 (친오빠가 소개해 준) 공장 구내식당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반복되는 일상에 지친 듯 윤희의 얼굴에는 피로감이 가득합니다. 퇴근하고 집으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늘 그러는 듯 전봇대 옆에서 사람들 눈을 피한 채 담배를 피우며 고단한 하루를 닫습니다. 이따금 집 앞에 찾아오는 전남편은 취기에 윤희를 걱정하고, 아직 잊지 못하는 것만 같습니다. 윤희는 그런 그를 단호하게 보냅니다. 조금의 미련도 남지 않은 것처럼. 새봄은 엄마의 편지를 몰래 읽은 뒤로 엄마에 대한 궁금증이 점점 커져만 갑니다. 어린 시절 엄마는 어땠는지, 아빠는 엄마와 왜 헤어졌는지 엄마에게 직접 묻지 않고, 삼촌, 아빠와 같은 주변 사람들에게서 그 궁금증을 풀어보려고 합니다. 

너희 엄마는 뭐랄까.
사람을 좀 외롭게 하는 사람이야.

 
  새봄은 용기 내어 엄마에게도 궁금한 것들을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엄마의 어린 시절은 어땠는지, 엄마는 무엇 때문에 사는지 묻다가 끝내 엄마의 마음에 생채기를 냅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아빠의 연애 소식까지 전합니다. 그건 새봄은 그저 엄마와 함께 오타루 여행을 떠나기 위한 서투른 빌드업이었습니다. 윤희는 뜬금없는 새봄의 제안을 흘러 넘겼지만, 쥰이 보낸 편지를 받고 마음이 어지러워지기 시작합니다. 당연하게 가던 공장 출근차량에 타지 않고, 정처 없이 걷다가 어딘가로 떠나는 기차를 바라봅니다. 기차를 떠나보낸 윤희는 허연 입김을 내며 슬픈 눈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마음속으로 새봄과 함께 오타루에 가기로 결정한 것이 이때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쥰은 스무 살이 되던 해, 부모님이 이혼했습니다. 엄마는 한국에 남았고, 아빠는 일본으로 떠났고, 아빠를 따라 간 쥰은 고모 마사코에게 맡겨졌습니다. 쥰은 오랫동안 고모와 살면서 아빠와는 근근이 통화를 하곤 했는데, 얼마 전 아빠가 돌아가셨습니다. 20년 만에 쥰은 문득 윤희가 그리웠고, 윤희에게 소식을 전하고 싶어 펜을 들어 편지를 쓰게 된 겁니다. 쥰은 고모와 함께 오타루에 살고 있고, 둘은 고요한 겨울의 오타루를 좋아합니다. 쥰은 윤희도 이곳을 좋아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쥰은 윤희가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는 걸 알고 있었고, 그리운 윤희에게 편지를 부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윤희가 꿈에 나오고, 처음 쓰는 편지처럼 전하지 못할 말들이 쌓여가고 있었습니다. 둘은 단순한 우정으로 치부될 수 없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깊어지는 마음을 조심스레 읽을 수 있습니다. 쥰은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접근하는 료코에게 내어줄 마음의 자리가 없습니다. 종일 어지러운 마음으로 방황하다 돌아온 쥰에게 마사코 고모는 팔을 벌려 그를 가만히 안아줍니다. 서로가 어색한 첫 포옹은 둘의 마음을 조용히 울리고, 시간이 잠시 멈춰버린 듯합니다. 그 어떤 말보다 더 강하고도 사려 깊은 위로가 오갑니다. 
 
  윤희는 용기 내어 영양사에게 휴가를 요청하지만, 매정한 영양사의 태도에 과감하게 사표를 냅니다. 그렇게 자신의 일상을 모두 내려놓은 채 윤희는 오타루로 향합니다. 다시, 영화의 첫 장면으로 돌아옵니다. 기차 안에는 빨간 목도리의 새봄, 초록 목도리의 윤희가 타고 있습니다. 사실 오타루에 둘만 온 건 아닙니다. 새봄의 남자친구 경수도 왔습니다. 오타루에서 엄마 몰래 경수와 만난 새봄은 합심해서 비밀 프로젝트를 실행하고 있습니다. 경수는 쥰이 사는 곳, 마사코가 일하는 카페를 미리 탐색하고, 새봄과 사전답사까지 수행합니다. 그 사이 윤희도 쥰이 이곳에 살고 있다는 걸 알고 몰래 쥰의 집을 찾아갑니다. 출근하는 쥰을 보게 되지만, 쥰과 마주할 수는 없는 윤희는 숨어 버립니다. 다시 숙소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도 윤희는 마음 편히 울 수 없습니다. 그저 속으로 울음을 삼킬 뿐입니다.
 
  오타루에서의 윤희와 새봄은 한국에서와는 달리 좀 더 가까워진 듯하고, 대화의 흐름도 부드럽습니다. 여행이 주는 좋은 기운 때문일까요. 피로감 가득하던 윤희의 마음에도 여유가 생겼는지, 비밀 프로젝트를 들키고 싶지 않은 새봄의 조심스러움 때문이지는 알 수 없습니다. 새봄은 굳이 묻지 않아도 엄마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게 되고, 엄마의 속마음도 자연스레 흘러나옵니다. 엄마가 담배 피운다는 것도, 새봄에게 남자친구가 있다는 걸 엄마가 알고 있다는 것도, 오타루에 엄마의 옛 친구가 산다는 것도, 엄마가 새봄의 비밀 프로젝트를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다는 것도 말입니다. 결국 새봄은 경수와 함께 있는 모습을 엄마에게 들키게 됩니다. 그 모습을 본 엄마는 새봄에게 경수와 함께 할 시간을 허락하고, 본인도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게 됩니다.
 
  새봄은 본격적으로 비밀 프로젝트의 마지막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마사코의 카페에 들어갑니다. 새봄은 다음날 아침에 쥰을 카페에서 만나고 싶다고 마사코에게 부탁합니다. 쥰과 만난 새봄은 함께 저녁을 먹자고 제안합니다. 새봄은 사실 엄마와 쥰을 만나게 하기 위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녁 6시, 오타루 운하에서 쥰과 윤희가 만납니다. 20년 만에 만난 둘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서로 지긋이 바라보다 차오르는 눈물을 들키기 싫어 옅게 미소를 지어봅니다. 둘의 만남을 성공적으로 성사시킨 새봄은 안도의 한숨을 내뱉습니다. 둘은 눈이 내리는 길을 천천히 걷습니다. 가벼운 인사말을 주고받은 뒤 폭폭 눈 밟는 소리만이 정적을 채웁니다. 찰나의 만남 후 다시 돌아온 한국에서 윤희도 용기 내어 쥰에게 편지를 씁니다. 쥰에게 헤어지자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마음,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마음, 지난 20년 동안 보고 싶었던 마음, 쥰의 행복을 간절히 빌었던 마음을 한 자 한 자 차분히 써 내려갑니다. 

언젠가 내 딸한테 네 얘기를 할 수 있을까?
용기를 내고 싶어.
나도 용기를 낼 수 있을 거야.

 
 

출처: 네이버 영화 - 포토 - 스틸컷

 


더없이 아름답고 따뜻한, 내게 있어 최고의 퀴어 영화

 
  이 영화는 언제 다시 꺼내 보아도 늘 새로운 마음으로 따뜻해집니다. "윤희에게"라고 담담하게 읽어 내려가는 쥰의 목소리, 언제쯤 그칠지 모를 함박눈, 마사코의 말없이 건네는 따뜻한 위로, 낡고 오래된 윤희(또는 새봄)의 필름 카메라, 그 카메라로 바라보는 새봄의 시선, 장면 하나하나, 대사 하나하나 세심하게 다듬었을 감독의 각본과 연출까지. 그리고 다시 보니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오타루 운하의 멋진 밤풍경, 독신이었던 삼촌과 고모, 경수를 향한 새봄만의 애정표현, 고모가 좋아하던 SF소설, 경수의 필름 셀카, 카페에서 담배 태우던 할머니, 윤희의 녹색 귀걸이, 세 번의 주문 같은 혼잣말, 세 번의 따뜻한 포옹, 쉴 새 없이 흔들대던 고양이 쿠지라의 꼬리까지. 언젠가 겨울의 오타루에 가게 된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니 조만간 또 한 번 보고 싶어집니다. 그렇게 다시 보면 또 새로울, 더없이 아름답고 따뜻한, 내게 있어 최고의 퀴어 영화라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저희 영화 <윤희에게>는 퀴어 영화입니다.
이 당연한 사실을 말씀드리는 이유는
방송을 보시는 분들 중에
아직 이 영화가 어떤 영화인지 모르는 분들도 혹 있을 것 같아서요.
보시다시피 지금은 LGBTQ 콘텐츠가 자연스러운 2021년입니다.
그게 정말 기쁘고요.
앞으로 더 고민해서 좋은 영화 찍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제41회 청룡영화상 임대형 감독 각본상 수상 소감 중에서

 
 
 


 
▷영화정보
감독: 임대형 / 각본: 임대형 / 제작사: 영화사 달리기 / 배급사: 리틀빅픽쳐스 / 개봉일: 2019.11.14 / 러닝타임: 105분 / 배우: 김희애, 나카무라 유코, 김소혜, 성유빈, 키노 하나, 유재명 등 / 장르: 드라마
 
 
▶ 영화 <윤희에게>는 유플러스 모바일TV(단품구매), 웨이브(스트리밍), 티빙(스트리밍), 왓챠(스트리밍), 넷플릭스(스트리밍)를 통해서 다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