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스럽고 무해한 '만섭'
저는 작은 영화라 불리는 독립영화를 즐겨보는 편입니다. 그 즐거움의 시작에는 영화 <족구왕>이 있었습니다. <족구왕>을 즐겁게 볼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주인공 '만섭'으로 열연한 배우 안재홍 덕분일 겁니다. 최근 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독보적인 캐릭터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배우입니다. 좋아하는 이웃집 동생을 위해 라디오 사연을 보내는 <응답하라 1988>의 김정봉, 좋아하는 사람을 평양냉면집에 데리고 가는 <멜로가 체질>의 손범수, 좋아하는 동료에게 “아이시떼루”를 외치는 <마스크걸>의 주오남, 닭강정으로 변해버린 짝사랑을 찾아 나서는 <닭강정>의 고백중이 있기 전, <족구왕>의 홍만섭이 있었습니다. ‘만섭’ 이후 ‘정봉’과 ‘범수’와 ‘오남’과 '백중' 그리고 수많은 인물로 변신한 안재홍 배우이지만, 사랑스럽고 무해한 ‘만섭’의 존재는 여전히 그의 캐릭터 면면에 살아 숨 쉽니다.
좋아하는 걸 숨기고 사는 건 바보 같다고
영화의 오프닝을 보면, 자연스럽게 주성치 영화 <소림축구>의 유명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첫 등장부터 '족구왕'의 이미지를 각인시키며 주인공 '만섭'이 어떤 캐릭터인지 강렬하게 보여줍니다. 하지만 후임으로부터 전역 통보를 받고, 후임들이 선물해 준 자랑스러운 전역모를 쓰고 사회로 나옵니다. 금의환향하듯 학교로 돌아온 그는 영락없는 복학생입니다. 등산복 차림에 조금 촌스럽기까지 합니다. 짧은 머리에 군기가 바짝 든 모습은 여전히 군인의 티를 벗지 못한 채 그저 겉도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취업에 골몰하는 여느 학생들과 달리 쉬는 시간에 친구와 우유팩차기를 하며 천진하게 땀 흘리는 모습은 유별나 보이기까지 합니다. 테니스장을 바뀐 족구장을 다시 만들어달라고 서명을 받기도 합니다. 심지어 만섭은 학교 제일의 퀸카 안나에게 과제 파트너를 제안하고,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명함을 건넵니다. 안나 앞에서 자신만의 시그니처 포즈를 취한 채 세상 무해한 표정을 지어 보입니다. 안나 옆에는 훤칠한 키에 잘생긴 강민이 있어도 만섭은 개의치 않습니다. 좋아하는 마음을 부끄러워하거나 숨기지 않습니다. 아니, 숨기는 법을 모르는 것만 같습니다. 만섭에게는 ‘안나’만이 아니라 ‘족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자들이 싫어하는 족구 같은 거 하지 말라”는 안나의 말에 만섭은 망설임 없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남들이 싫어한다고 자기가 좋아하는 걸 숨기고 사는 건 바보 같다고.
재밌잖아요
만섭은 눈치 보지 않고 그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꿋꿋이 해 나갑니다. 물론 만섭이 허허실실 웃고 다니기만 하지 않습니다. 학비를 벌기 위해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고깃집 알바를 성실하게 해내고, 좋아하는 친구를 위해 정성스럽게 도시락을 싸기도 하고, 등록금을 내지 못해 듣지 못하게 된 수업의 과제를 멋지게 해냅니다. 만섭의 청춘은 그리 쉽지만은 않습니다. 묵묵히 제 일을 해내는 그의 앞에 놓인 장애물이 너무도 많습니다. 밀린 학자금 대출 이자, 안나 곁에 있는 강민, 매사 시비 거는 고운, 족구장 건립을 방해하는 학생처장, 공무원 시험 준비하라고 잔소리하는 형국 선배 앞에서 그는 해맑은 미소로 족구공을 든 채 이렇게 답할 뿐입니다.
재밌잖아요.
정말로 2063년 미래에서 왔을지도 모를 만섭은 자신의 청춘을 오롯이 만끽합니다. 페퍼톤스의 노래 <청춘>처럼, 짙푸른 봄이 돌아오면 영원처럼 어제처럼 이따금 생각날 낭만으로 흥건한 이야기가 여기 있습니다. 빛나는 시절이 그리운 사람, 청춘의 한복판에서 달리는 사람, 푸른 계절을 꿈꾸는 사람 모두가 즐겁게 볼 수 있는 영화 <족구왕>을 조심스레 권해봅니다.
▷영화정보
감독: 우문기 / 각본: 김태곤 / 각색: 우문기 / 제작사: 광화문시네마 / 배급사: KT&G 상상마당, 황금물고기 / 개봉일: 2014.08.22 / 러닝타임: 104분 / 배우: 안재홍, 황승언, 정우식, 강봉성, 황미영 / 장르: 드라마, 코미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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