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님이 없어도 평온한 이유
저는 잔잔하고 따뜻한 영화를 좋아하는 편입니다. 일전에 소개한 임순례 감독의 <리틀 포레스트>와 빔 벤더스 감독의 <퍼펙트 데이즈>도 비슷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영화들은 보고 또 보아도 질리지 않고, 볼 때마다 편안하고 따뜻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어 이따금 혼자의 시간을 보낼 때 종종 틀어놓곤 합니다. 이번에도 그런 영화 중 한 편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영화 <카모메 식당>입니다. 오래전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정도로 건강이 안 좋았을 때 오디오북으로 좋아하는 이 영화의 원작 소설을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내용은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영화에 나오지 않는 숨은 이야기들을 알게 되어 좋았습니다. 소설에서는 주인공 사치에가 어떻게 핀란드에서 자신만의 가게를 열 수 있었는지 구체적인 이야기로 풀어냅니다. 영화에서는 미도리가 사치에에게 계속해서 그 이유를 묻지만, 농담만 할 뿐 답변을 제대로 듣지는 못합니다. 사치에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부분적으로 설명되기는 하나 그가 여기에 올 수 있었던 건 복권에 당첨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릴 적부터 운이 남달랐던 그는 복권에 자신의 운을 한 번 더 믿어보기로 하고, 믿음 대로 복권에 당첨됩니다. 연고 없는 핀란드 헬싱키에서 식당을 차리고, 손님이 없어도 평온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굳이 설명하진 않습니다.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요. 복권은 수단이었을 뿐, 그녀가 추구하는 삶의 가치는 한결같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 끝나는 날엔 꼭 맛있는 걸 먹을 거예요
난 살찐 동물에게 약하다.
맛있게 먹는 모습에 너무 약하다.
영화는 뚱뚱한 갈매기의 등장으로 시작합니다. 핀란드의 갈매기를 보면서 사치에는 자신이 키우던 '나나오'라는 10kg 정도 되는 뚱냥이를 떠올립니다. 자신을 잘 따르던 귀여운 나나오는 결국 먹을 걸 너무 많이 주어 죽고 말았다고 사치에는 담담하게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누군가가 맛있게 먹는 모습에 약하다고, 다시 말하면 누군가에게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일 때 행복감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그는 어릴 적부터 스스로 행복의 가치를 정해놓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 마음 그대로 이어오던 사치에는 행복을 찾아 핀란드 헬싱키에 도착합니다. 갈매기라는 뜻을 가진 일본어 '카모메'라는 이름의 식당을 차립니다. 한 달째 사람이 없어도 그는 자신의 음식을 맛있게 먹어줄 누군가가 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아 보입니다. 어떤 식당인지 궁금해서 가게 안을 들여다보는 동네 주민들에게 웃으며 인사를 건넵니다. 늘 그랬듯 수영을 다녀오고, 아무도 없는 가게에서 그릇을 닦고 창밖을 바라보며 손님을 기다립니다. 마침내 첫 손님이 들어옵니다. 일본 만화 캐릭터 '냐로메' 티셔츠를 입은 핀란드 청년입니다. 일본문화에 관심이 많은 그는 '곤니찌와'로 인사를 건네고, 대뜸 '갓챠맨'을 좋아하냐고 사치에에게 묻습니다. 그러면서 ‘갓챠맨’의 주제곡을 아는지 물어봅니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는 '누구냐 누구냐 누구냐'만 맴돌 뿐 다음 가사가 도무지 떠오르지 않습니다. 한동안 답답함에 '누구냐'만 반복해서 흥얼거리던 그녀 앞에 또 다른 일본인 '미도리'가 등장합니다.
누구냐 누구냐 누구냐
하늘 저편에 춤추는 그림자
하얀 날개의 갓챠맨
목숨을 걸고 날아오르면
불새로 변신해 무찌른다
날아라 날아라 갓챠맨
앞으로 나가자 갓챠맨
하나뿐인 지구를 지켜라
하나뿐인 지구를 지켜라
오 갓챠맨 갓챠맨!
핀란드 시내의 한 서점에서 미도리는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사치에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실례를 무릅쓴 채 대뜸 그녀에게 다가갑니다. 갓챠맨 노래를 아는지 묻습니다. 다행히 미도리는 갓챠맨 노래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누구냐 누구냐 누구냐'의 다음 가사를 술술 읊자 사치에는 속이 뻥 뚫린 기분이 듭니다. 사치에는 보답으로 미도리를 자신의 집에 초대합니다. 소설에서는 미도리가 여행을 떠나온 사연이 구체적으로 실려 있습니다만, 영화에서는 무작정 떠나고 싶은 마음에 랜덤으로 정한 여행지인 핀란드에 왔다고 말합니다. 딱히 갈 곳 없이 찾아온 그녀였기에, 사치에의 제안에 응하게 됩니다. 그렇게 만화 <갓챠맨>의 노래로 연결된 인연들이 카모메 식당에 모두 모이게 됩니다.
관광지를 둘러보는 건 큰 의미가 없는지 금방 돌아온 미도리는 사치에에게 그녀의 식당에서 일해도 되는지 묻습니다. 돈을 벌기 위함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일까요. 사치에는 흔쾌히 허락합니다. 손님은 단 한 명뿐이고, 첫 손님이라는 토미는 매번 공짜 커피를 마실 뿐입니다. 하지만 어느새 식당에는 두 사람이 늘었고, 그만큼의 활기가 돕니다. 의욕 넘치는 미도리는 손님 없는 식당 걱정을 하면서 여러 가지 방법을 사치에에게 제안합니다. 하지만 욕심 없는 사치에는 묵묵히 일하다 보면 그저 언젠가는 손님이 올 거라는 희망만 내비칩니다.
저도 세상이 끝나는 날엔 꼭 맛있는 걸 먹을 거예요.
좋은 재료를 써서 잔뜩 만들고
좋은 사람만 초대해서
술도 한잔하면서
느긋하게 식사를 즐기는 거죠.
지금 당장의 목표에는 관심 없는 사치에는 그저 맛있는 음식을 나누는 일이 좋을 뿐입니다. 넉넉하고 태평스러운 사치에가 마음에 든 미도리는 그녀의 마음을 점점 닮아갑니다. 하지만 무엇이든 돕고 싶은 미도리는 욕심을 조금 부립니다. 그녀는 사비로 현지인이 좋아할 만한 재료를 사치에 몰래 사 옵니다. 가재랑 청어랑 순록고기까지 말입니다. 카모메 식당의 주 메뉴인 오니기리(주먹밥)의 속재료로 쓸 만한 것들을 사서 사치에 앞에 꺼내놓습니다. 사치에는 탐탁지 않지만, 미도리의 정성을 보고는 한 번 도전해 보기로 합니다. 하나하나 맛을 보지만, 결국 없던 일로 합니다.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드는 미도리는 사치에에게 사과합니다. 사치에는 문득 떠오른 시나몬빵을 만들어 보기로 결심합니다. 정성껏 만든 시나몬빵이 맛있게 구워집니다. 식당 바깥까지 퍼지는 좋은 시나몬향을 맡고 손님이 찾아옵니다. 그동안 가게 앞에만 서성이던 동네주민들을 자연스럽게 불러들인 겁니다.
마사코 says,
좋아 보여요. 하고 싶은 일 하고 사는 거..
사치에 says,
하기 싫은 일을 안 할 뿐이에요.
헬싱키 공항에서 오지 않는 여행가방을 기다리는 일본인 마사코가 등장합니다. 마사코는 가방 없이 나와 헤매다가 우연히 카모메 식당에 들어옵니다. 3일째 돌아오지 않은 짐을 기다리는 그녀의 표정은 답답해 보이기도 하고, 체념한 듯 보이기도 합니다. 핀란드에 찾아온 이유를 묻는 사치코의 질문에 마사코도 역시나 알쏭달쏭한 답변을 합니다. 다음 날에도 카모메 식당을 찾은 마사코는 여전히 짐을 찾지 못했지만, 한결 여유로워 보입니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치에가 부러운 마사코는 그녀의 단출한 대답에 작은 깨달음을 얻은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가게 문을 나섭니다. 입을 옷이 없는 그녀는 그제야 새 옷을 사서 갈아 입고, 다시 카모메 식당으로 돌아옵니다. 화사한 옷을 입은 마사코는 더욱 여유로운 모습으로 돌아옵니다. 그때 갑자기 식당 문 앞에 중년의 핀란드 여성 리사가 등장합니다. 그녀는 일전에 식당 앞에서 무서운 표정으로 노려보다가 지나가곤 했었습니다. 그런 그녀가 식당 안으로 들어오자 모두 긴장합니다. 술을 주문한 리사는 함께 마실 상대를 찾고, 기꺼이 응한 마사코와 대작을 합니다. 몇 잔 마시지 않았는데도 리사는 금세 주저앉아 버립니다. 토미의 도움을 받아 리사를 간신히 집까지 데려다줍니다. 잔뜩 취해버린 리사는 정신을 조금 차리더니 마사코에게 자신의 슬픔을 토로합니다. 갑자기 자신을 떠나버린 남편으로 인한 막막함을 고백하자 마사코는 그녀 곁에서 다 이해한다는 듯 살뜰하게 다독입니다. 핀란드어를 할 줄 모르지만, 그녀의 사연을 마음으로 이해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마사코는 20년간 자신의 부모를 간병해 온 사실을 고백합니다. 어느 날 뉴스에서 핀란드의 에어 기타 대회를 보게 됩니다. 시답잖은 일로 대회까지 여는 핀란드인이 부러웠던 그는 부모님을 모두 떠나 보낸 후에야 핀란드행을 택하게 된 겁니다. 여유 없이 살아온 지난 삶을 돌아보며 여유 넘치는 핀란드인들에게는 어떤 비결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마사코의 말을 가만히 듣던 토미는 핀란드인들의 여유는 숲에서 나온다고 말합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마사코는 숲으로 향합니다. 숲을 찾은 마사코는 그곳에서 엉뚱하게도 노오란 버섯을 따서 가방에 모읍니다. 숲에서 버섯 따는 일이 당연하다는 듯 사치에는 숲에서 버섯을 땄는지 묻습니다. 마사코는 가방에 모은 버섯들을 오다가 흘렸는지 전부 없어졌다는 아리송한 말을 합니다. 그리고 오니기리를 주문합니다. 오니기리를 제외한 메뉴만 주문받던 식당에서 첫 주문이 들어온 겁니다. 식당 안의 손님들 모두 오니기리를 맛있게 먹는 마사코를 잠시 주목합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치에는 미소를 짓습니다.
배고프네요
지난번 소동을 일으킨 리사가 식당에 찾아옵니다. 사치에에게 사과를 전하며 시나몬롤과 커피를 주문합니다. 이 식당에는 어느새 마사코도 직원이 되어 일하고 있습니다. 한산하던 식당에는 사장님과 두 명의 직원이 있고, 손님들로 북적이는 공간으로 변합니다. 식당이 쉬는 날, 사치에, 미도리, 마사코, 리사는 화려하게 옷을 입고 다같이 나들이를 갑니다. 다시 돌아온 식당에는 누군가 침입한 흔적이 보입니다. 주방 안에 도둑으로 보이는 사람이 있어 사치에가 망설임 없이 다가가 단번에 제압합니다. 역시 무도가의 딸은 다릅니다. 도둑은 여기서 가게를 하던 사장 마티였고, 일전에 사치에를 찾아와 맛있는 커피 만드는 법을 알려준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소유였던 커피 머신을 몰래 가지고 가려다 들킨 겁니다. 기왕 이렇게 모인 모두 배가 고픈 상황에 놓입니다. 배고픈 모두를 위해 사치에는 오니기리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오니기리가 생소한 리사와 마티 그리고 고향의 맛을 좋아하는 사치에와 두 직원은 한 테이블에 앉습니다. 모두가 말없이 오니기리를 맛있게 먹습니다. 사치에의 아버지가 일 년에 딱 두 번 만들어 주던 오니기리가 그녀의 기억에는 소중하게 남아 있습니다. 운동회와 소풍 갈 때였고, 연어, 매실, 말린 생선을 넣은 크고 볼품없는 오니기리였지만, 어린 사치에는 그게 그렇게 맛있었다고 고백합니다. 오니기리가 카모메 식당의 주메뉴일 수밖에 없던 이유입니다.

그리 대단치 않은 소소한 그것들이
이상한 아저씨가 고양이를 떠맡겨서 못 돌아갔어요.
그래서 여기서 지낼까 하는데요.
일을 좀 도와도 될까요?
마침내 마사코는 짐을 찾습니다. 이젠 정말로 돌아갈 때가 된 것 같아 카모메 식당에 들러 작별을 예고합니다. 사치에와 미도리는 그간 정이 많이 든 마사코를 보내야 하는게 못내 아쉽지만, 그녀의 결정을 존중합니다. 커다란 캐리어를 되찾아 힘겹게 끌고 숙소로 돌아온 마사코는 캐리어를 엽니다. 그 안에는 노오란 아니 황금빛 버섯이 가득 들어있습니다. 그녀가 숲에서 따던 버섯들이 보입니다. 아무래도 짐이 바뀐 것 같아 항공사에 연락해 봅니다. 그 사이 어떤 할아버지가 자신의 고양이를 마사코에게 건네줍니다. 마사코는 고양이 때문에 핀란드에 더 머물기로 결정하고, 다시 카모메 식당에서 일하기로 합니다. 그녀의 가방 안에 가득한 황금 버섯은 무슨 의미일지, 항구를 늘 서성이던 할아버지가 왜 그녀에게 고양이를 전해주었는지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녀에게는 그것이 이곳에 더 있어야 할 이유가 되었습니다. 카모메 식당에는 손님들이 끝없이 몰려듭니다. 주방 또한 음식을 만드느라 분주합니다. 테이블 위마다 맛있는 음식들이 가득합니다. 오랜만에 식당을 찾은 리사는 오니기리를 주문합니다. 꼭 세상 끝나는 날이 아니더라도 사치에는 좋은 재료를 써서 잔뜩 만들고, 손님들은 그녀가 만든 맛있는 음식을 느긋하게 즐깁니다.
그리 대단치 않은 소소한 그것들이
오늘도 한걸음 내딛을 용기를 불어넣습니다.
코피루왁, 숲, 오니기리, 갓챠맨, 고양이, 시나몬롤, 무릎 걷기, 수영 그리고 카모메와 이랏샤이까지 영화의 키워드들을 하나씩 떠올리며 영화를 곱씹어 봅니다. 그리 대단치 않은 소소한 그것들이 오늘도 한걸음 내딛을 용기를 불어넣습니다. 정말로 이 세상엔 모르는 게 아직 너무 많고, 아직 먹어 보지 못한 맛있는 음식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남이 타주는 커피가, 남이 만들어 주는 요리가 제일 맛있다는 사실도 말입니다. 사치에의 기분 좋은 인사로 끝나는 이 영화는 소소한 행복의 공간에 역시 당신도 기꺼운 마음으로 초대합니다.
▷영화정보
감독: 오기가미 나오코 / 각본: 오기가미 나오코 / 원작 : 무레요코의 <카모메 식당> / 제작사: 닛폰TV / 배급사: 닛폰TV, 스폰지 / 개봉일: 2007.08.02 / 러닝타임: 102분 / 배우: 고바야시 사토미, 카타기리 하이리, 모타이 마사코, 야르코 니에미, 타르자 마르쿠스, 마르쿠 펠톨라 / 장르: 드라마, 코미디
▶ 영화 <카모메 식당>은 웨이브(단품구매,스트리밍), 유플러스 모바일TV(단품구매), 쿠팡플레이(스트리밍), 티빙(스트리밍), 왓챠(스트리밍). 넷플릭스(스트리밍)를 통해서 다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