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또 보고픈 영화
저는 상영중인 영화를 두 번 이상 보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영화의 내용을 이미 알고 보는 두 번째에는 (다음 장면을 알 수 없어 생기는) 호기심과 긴장감이 사라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영화만큼은 몇 번이고 더 보아도 좋았습니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만큼은 영화관에서 두 번이나 보았고, 집에서 넷플릭스로 또 보았습니다. 주인공 히라야마의 잔잔한 일상이 반복해서 나오니 어찌 보면 지루해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정한 리듬을 타는 타인의 일상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보는 이로 하여금 묘한 안정감을 느끼게 합니다.
빔 벤더스 says,
언제나
같은 패턴으로 반복되는 일상 속의
규칙적인 리듬이 아름다운 이유는
모든 사소한 것들이 똑같지 않으며
매번
달라진다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주인공 히라야마는 도쿄 시부야에서 이층 집에 홀로 거주하는 공공화장실 청소부입니다. 단출해 보이는 그의 살림살이이지만, 하나하나 살펴보면 매우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습니다. 반듯이 개켜 놓은 이불, 1단 책장에 빽빽이 꽂힌 책들, 2층 한 켠에 모여있는 식물들, 문 앞에 놓인 열쇠꾸러미와 동전들까지 히라야마가 어떤 사람인지 단번에 알 수 있습니다. 이른 새벽 빗질 소리에 잠에서 깬 그는 짧은 한숨을 내쉽니다. 곧바로 읽던 책을 정리하고, 늘 그랬듯 자연스럽게 이부자리를 개고, 목에 수건을 두르고 양치와 면도를 합니다. 2층으로 올라가 분재에 물을 준 뒤 늘 그 자리에 걸려 있는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1층으로 내려옵니다. 문 앞에 둔 열쇠꾸러미를 챙기고, 동전 몇 푼을 손에 쥐고는 밖을 나섭니다. 집 바로 앞에 있는 자판기에서 캔커피를 뽑은 뒤 그의 작업차인 미니 봉고에 오릅니다. 차 안에 있는 여러 가지 음악테이프 중에 하나를 골라 오디오 기계에 밀어 넣고는 커피를 벌컥벌컥 마십니다. 올드 팝이 흐르는 차 안에서 그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첫 번째 작업장으로 향합니다.
다음은 다음이고, 지금은 지금!
잔잔한 호수 같은 히라야마의 일상에 작은 파문을 일으키는 돌멩이 같은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첫 번째 돌멩이는 동료 청소부인 타카시입니다. 어느 날 그의 여자친구 아야가 일터로 찾아옵니다. 평소 늑장 부리고 대충대충 일하던 그는 빠른 퇴근을 위해 그동안 못 보던 열심을 냅니다. 하지만 그의 오토바이는 그의 맘 같지 않습니다. 결국 히라야마의 차를 빌려 타고 함께 퇴근합니다. 패티 스미스의 <Redondo Beach>가 흐르는 차 안. 타카시는 아야의 관심을 끌어내려고 애쓰지만, 아야는 도통 관심이 없습니다. 그녀는 그저 노래에 흠뻑 빠진 채 별다른 대꾸도 하지 않습니다.
아야 says,
카세트테이프 소리 좋다.
처음 들어 봐.
(리듬에 맞춰 고갤 흔들며 조용히 노랠 읊조린다)
타카시는 아야가 맘에 들어한 카세트테이프를 히라야마 몰래 그녀의 가방에 넣습니다. 아야가 내린 후 그녀와의 데이트 비용이 없다며 푸념하는 타카시는 급기야 돈이 되는 테이프를 팔러 가자고 히라야마에게 매달립니다. 타카시의 무례함은 극에 달하지만, 히라야마는 무례한 그에게 화내지 않습니다. 히라야마는 지갑에 있는 돈을 전부 털어 타카시에게 내어줍니다. 허나 갑자기 기름이 바닥난 차 때문에 빈털터리인 그는 결국 카세트테이프를 팔고 맙니다. 보통의 하루였다면, 늘 가던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겠지만, 그날은 집에서 컵라면으로 끼니를 해결합니다. 그다지 큰 돌멩이는 아니었던 것인지 그는 다시 평소처럼 책을 읽다 잠이 듭니다. 물론 빌린 돈도 갚지 않고, 갑자기 그만둔 타카시 때문에 늦은 밤까지 종일 고생스럽게 일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다음날 캔커피를 두 캔이나 마셔도 피곤은 쉬이 가시지 않습니다. 종내 청소업체에 화를 내는 히라야마의 모습을 보게 되지만, 그의 요청대로 다음날 새로운 동료가 합류하자 한숨 돌리고, 다시 평정심을 되찾습니다.
알고 보면 이 세상은
수많은 세상으로 이뤄져 있거든.
연결된 것처럼 보여도
그렇지 않은 세상이 있지.
내가 사는 세상과..
니코 엄마가 사는 세상은 많이 달라.
갑자기 날아온 작은 돌멩이 하나는 히로야마의 조카 니코입니다. 보통의 하루를 마치고 퇴근한 그의 집 앞에 니코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본인의 잠자리를 조카에게 내어주고, 비좁은 쪽방에 몸을 누입니다. 아침에는 조카가 깰까 염려되어 사뿐사뿐 걸어 조용히 출근준비를 합니다. 하지만 일터에 같이 가고 싶어 하는 니코를 데리고 함께 집을 나섭니다. 자판기에서 음료 하나를 더 사서 조카와 나눠 마시고, 함께 음악을 들으며 일터로 향합니다. 니코는 삼촌의 일을 도와주고 싶어 하고, 함께 점심을 먹으며 사진을 찍는 삼촌을 찍기도 합니다. 니코는 엄마가 사는 세상에서 잠시 벗어나 삼촌의 세상에 시나브로 스며듭니다. 삼촌과 나란히 자전거를 타고, 삼촌이 읽던 책을 따라 읽기도 합니다.
다음은 다음이고,
지금은 지금!
삼촌의 세상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에 기약 없는 다음 약속을 만들어 보려 합니다. 하지만 삼촌은 약속하지 않습니다. 삼촌의 세상은 과거와 미래는 없고 오로지 현재만이 존재합니다. 히라야마는 언제까지 데리고 있을 수 없는 조카를 다시 돌려보내기 위해 동생에게 연락합니다. 이내 니코는 오랜만에 오빠 히라야마의 집에 찾아옵니다. 삼촌의 세상과 작별해야 하는 조카에게 언제든 놀러 오라는 다음을 선물합니다. 그리고 오빠는 동생에게 건네는 짧은 포옹으로 말할 수 없었던, 말하지 못했던 지난 마음들을 용기 내어 고백합니다.
언제든 놀러 와
세 번째 돌멩이는 목소리가 좋고 친절한 단골 술집의 여사장입니다. 주말에 빨래방에 가는 날이면 언제나 들르는 술집에서 한 잔 걸치는 시간이 히라야마의 낙 중 하나입니다. 그날도 보통날과 다를 바 없는 히라야마는 술집에 들렀다가 여사장이 다른 남자와 포옹하는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됩니다. 곧바로 황급히 자릴 뜬 그는 급기야 편의점에서 담배 한 갑과 캔맥주를 사서 강변으로 향합니다. 꽤 오랜만에 피는지 첫 한 모금에 연신 기침을 해댑니다. 갑자기 한 남성이 찾아와 담배를 빌립니다. 그는 아까 여사장과 포옹하던 남자인 토모야마입니다. 아무래도 두 사람의 모습을 본 히라야마의 뒤를 따라온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는 히라야마에게 본인의 사정을 필요 이상으로 설명합니다. 여사장과는 7년 전 이혼했고, 지금은 새 가정을 꾸렸지만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고 불현듯 전부인에게 감사과 사과의 인사를 하고 싶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녀를 잘 부탁한다는 말을 하지만, 히라야마는 그에게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 해명합니다.
토모야마 says,
그림자는..
겹치면 더 어두워질까요?
(마침 여러 캔 사놓은) 캔맥주를 나눠 마시던 둘은 문득 생긴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밝은 조명 아래에서 서로의 그림자를 겹쳐 봅니다. 히라야마는 조금 어두워진 것 같다고 말하지만, 토모야마는 변한 게 없다며 억지 같다고 답합니다. 어느새 갑자기 마음의 거리가 좁혀진 둘은 아이처럼 '그림자밟기' 놀이를 시작합니다. 두 사람은 천진하게 놀이를 하며 환화게 웃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히라야마의 마음이 가벼워 보입니다.
코모레비, 나의 빛나는 순간들을 위하여
이른 새벽, 알람 소리에 눈 뜬 저는 양압기 마스크를 벗고 가벼운 한숨을 뱉습니다. 잠시 미적대다 일어나 곧장 부엌으로 향합니다. 냉동 들깨미역국을 전자레인지에 넣고 화장실로 갑니다. 이 닦고 나와 뜨끈해진 국을 꺼낸 뒤 냉동밥을 데웁니다. 그 사이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 식판에 담습니다. 신속하게 사진을 찍고, 오늘의 아침밥을 허겁지겁 입 안에 밀어 넣습니다. 말끔히 비워낸 식판을 싱크대에 넣어 두고, 갖가지 영양제를 물과 함께 넘깁니다. 잠옷을 훌렁 벗고, 서둘러 샤워를 마친 후 드라이기로 머릴 말립니다. 간단히 스킨로션 바르고 옷을 입습니다. 카드지갑, 핸드폰, 손수건, 안경수건, 립밤을 양 주머니에 쑤셔 넣고 문밖을 나섭니다. 십여분을 걸어 도착한 지하철 역 계단을 빠르게 내려갑니다. 곧이어 도착하는 열차에 오르고 나면 안도의 한숨이 쉬어집니다. 만원 열차 안에서 저는 제일 먼저 핸드폰을 켜서 인스타의 아침밥 기록 계정에 들어갑니다. 아까 찍어둔 아침밥 사진과 더불어 어제의 기분, 오늘의 아침 메뉴, 오늘의 다짐을 끄적입니다. 오늘의 아침밥 기록이 끝나면 주머니 속에 든 에어팟을 꺼내 귀에 꽂습니다. 히라야마가 카세트테이프를 고르듯, 오늘의 기분에 맞는 음악을 골라 재생하면, 본격적인 하루의 시작을 실감합니다.
어떤 기록을 시작하든
‘시간이 쌓인 기록은 그게 무엇이든 귀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삶이란 건 원래
한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이야기니까요.
김신지, <기록하기로 했습니다> p.211 「Epilogue」
도쿄의 화장실 청소부 히라야마의 아침 루틴과 저의 루틴을 살포시 겹쳐 봅니다. 닮은 듯 또 다른 하루를 사는 히라야마는 끊임없이 순간을 포착하고 기록을 남깁니다. 김신지 작가는 <기록하기로 했습니다>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시간이 쌓인 기록은 그게 무엇이든 귀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입니다. 저도 히라야마도 유일한 한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순간들을 모으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나뭇잎 사이로 잔잔하게 일렁이는 순간, 어김없이 카메라를 꺼내 드는 그와 같이. 새해에도 수많은 코모레비로 반짝반짝 일렁일 각자의 빛나는 순간들을 위하여.
코모레비 :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일렁이는 햇살
▷영화정보
감독: 빔 벤더스 / 각본: 빔 벤더스, 타카시 타쿠마 / 제작사: 마스터 마인드, 스푼, 벤더스 이미지스 / 배급사: 비터스 엔드, DCM, 티캐스트, 네온 / 개봉일: 2024.07.03 / 러닝타임: 124분 / 배우: 야쿠쇼 코지, 에모토 토키오, 나카노 아리사 등 / 장르: 드라마
▶ 영화 <퍼펙트 데이즈>는 시티극장, 메가박스 등에서 상영중이며, 웨이브(단품구매), 유플러스 모바일TV(단품구매), 왓챠(단품구매), 넷플릭스(스트리밍)를 통해서 다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