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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70 : 종로3가역 6번 출구 저녁 7시의 그곳에서는

by oneulbreakfast 2025. 8. 21.

 

출처 : 네이버영화 - 포토 - 포스터

언제나 외로운 0의 마음

 

  오늘의 영화는 <3670>입니다. 오는 93일 개봉을 앞둔 박준호 감독의 첫 장편 데뷔작인데요. 올해 샌프란시스코 국제영화제 월드 프리미어로 첫 상영을 시작으로, 전주국제영화제 4관왕(배급지원상, CGV, 왓챠상, 배우상(김현목))을 수상했고, 무주산골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언급을 받으며 주목받았습니다.. 더불어 디아스포라 영화제, 썸머프라이드시네마 등 여러 영화제에서 상영되었고, 영화 평단과 씨네필들에게 벌써부터 호평이 이어지는 화제작입니다. 아직 개봉 전이지만, 저는 이미 영화제를 통해 관람 2회차를 찍었습니다. 다시 보아도 재밌고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이 영화를 더 많은 관객들에게 추천하고픈 마음에 서둘러 소개하고자 합니다.

 

  주인공 철준은 북에서 남으로 넘어와 0에서부터 출발하는 97년생 탈북 청년입니다. 남한 땅에서 1로 자립하기 위해 쉼 없이 일하고 틈틈이 공부하며 누구보다 열심히 하루하루를 살아냅니다. 철준에게는 탈북자 친구들, 탈북민을 돕는 고마운 사람들이 곁에 있지만, 그는 언제나 외로운 0의 마음이 됩니다. 누구에게도 차마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기 때문입니다. 남자인 철준이 남자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 철준에게는 그 비밀을 나눌 친구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탈북자 친구들은 철준에게 좋아하는 여자가 있는지 묻거나 괜찮은 여자를 연결시켜 줄 궁리만 합니다. 그럴 때마다 철준은 그들에게서 점점 멀어지고, 고독한 0의 마음은 점점 깊어만 갑니다. 0에서 벗어나고픈 철준은 자신과 닮은 1을 찾기 위해 애써 용기 내보지만, 매번 그저 쓸쓸한 방 안에서 0으로 머뭅니다.

 

나 이런 거 처음 말해 본다

 

  어느 날 갑자기 철준에게 1이 찾아옵니다. 그는 지난번 용기 내어 찾은 술번개 참석자 무리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날의 술번개 자리에는 수십 명의 남자들이 모였고, 방장의 진행 하에 참석자들은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했습니다. 철준은 목동에서 산다고 소개했지만, 숨길 수 없는 말투에 결국 북에서 왔다고 밝혔습니다. 사람들은 철준의 출신에 대한 호기심을 드러냈지만, 그에게 호감을 가지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자 방장은 모두에게 한 장의 빈 쪽지를 나눠주었습니다. 일명 러브레터입니다. 쪽지 맨 위에 마음에 드는 한 사람의 이름을 적고, 그 밑에는 본인의 이름과 휴대폰 번호를 적으면, 그 쪽지가 마음에 든다고 적은 그 사람에게 전달되는 방식입니다. 철준도 마음에 드는 한 사람을 적었지만, 자신에게 돌아오는 쪽지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다시 0이 되고 며칠이 지난 후, 자신이 일하는 편의점에 갑자기 1이 찾아온 겁니다. 철준이 그를 기억하는지 기억하지 못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는 철준과 러브샷을 했었고, 철준이 선택했던 남자와 함께 밖으로 나간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영준입니다. 철준이 일하는 편의점에 담배를 사러 온 영준은 특유의 친화력으로 그에게 인사를 건넵니다. 영준은 철준이 일하는 편의점 근처 아파트에 살고 있고, 철준과 같은 97년생 동갑내기입니다.

 

나 이런 거 처음 말해 본다.
맨날 머릿속으로 생각만 해본 말들,
오늘 처음 입 밖으로 꺼내봤다.


출처 : 네이버영화 - 포토 - 스틸컷

 

  인사만 건네기 아쉬운 영준은 철준과 더 이야기 나누고 싶어 합니다. 철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두 사람은 철준이 편의점 아르바이트 끝나는 저녁시간에 근처 공원에서 만나기로 약속합니다. 어느새 어둑해진 밤의 공원에서 철준과 영준은 산책로를 따라 나란히 걷습니다. 친구끼리 나눌 수 있는 소소한 대화들이지만, 철준은 쉽사리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던 말들을 영준에게 거리낌 없이 털어놓습니다. 그동안 같이 하룻밤을 보낸 남자들만 있을 뿐,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은 적은 한 번도 없던 철준이었습니다. 20년 동안 속 끓이며 0의 굴레를 갇혔던 그 말들이 막상 세상 밖으로 나오니 영준 앞에선 별 것 아닌 게 됩니다. 영준에게는 당연하던 것들이 철준에게는 첫 순간이라는 사실에 영준은 살짝 놀랍니다. 속이 뻥 뚫린 것 같은 기분으로 안도하며 한결 편안해진 얼굴을 보이는 철준에게 영준은 자신이 속한 동갑모임에 같이 가자고 조심스레 권합니다.

 

아, 삼육칠.
이게 뭐냐면 종로 3가, 6번 출구, 7시.
단톡방에서 갑자기 오늘 볼 사람 모집할 때 이렇게 하는데,
가고 싶으면
뒤에 참석인원 숫자 하나 더해서 올리면 돼.
졸라 어이없지?

 

  철준은 영준의 초대로 97년생 동갑모임에 나가게 됩니다. 철준은 탈북자 친구들과 찾은 옷가게에서 옷 살 때에도 차마 동갑모임에 입고 갈 옷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비밀이 늘어갈수록 탈북자 친구들과의 사이도 점점 멀어집니다. 반면 영준과는 급속도로 가까워집니다. 영준은 첫 동갑모임에서 철준을 살뜰히 챙기고, 집도 같은 방향이라 함께 귀가하고, 자기 전 서로 카톡도 주고받습니다. 절친한 2가 된 철준과 영준은 쉬는 날에 코인노래방에 함께 가고, 자소서 쓰기 위해 나란히 앉아 시간을 보내기도 합니다. 그리고 평일에 갑자기 열리는 동갑모임에 함께 가기 위해 단톡방에 ‘3676’이 뜹니다. 철준은 여기에 ‘2’를 더해 ‘3678’을 남깁니다.

 

너,
아기오리가 태어나서
처음 본 존재를
엄마로 기억하는 거 알지?
너도 내가 처음 친구라서 각별한 거야.
나도 그랬어.

 

 

  동갑모임 친구들과의 만남도 잦아지고, 어느덧 0의 기억은 흐릿해집니다. 철준은 동갑친구 현택의 생일파티에도 초대받게 됩니다. 이태원에서 열리는 현택의 생일파티에 철준은 영준과 함께 갑니다. 이태원, 루프탑, 게이클럽, 하네스까지 모든 게 처음인 철준은 낯설어하면서도 즐거워합니다. 사실, 현택은 철준이 술번개에서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선택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걸 현택도 알고 있었는지, 게이클럽의 어두운 공간으로 철준을 데리고 가서 키스를 퍼붓습니다. 하지만 그때의 마음과는 많이 달라진 철준은 현택을 밀어내고 영준에게로 갑니다. 방금 전 현택과의 일을 본 것 마냥 영준은 철준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밀어내려 합니다. 하지만 철준은 영준과 함께 있고 싶어 합니다. 영준도 더 이상 밀어내지 않고 철준과 함께 춤을 춥니다. 사랑인지 우정인지 알 수 없는 그들의 관계는 테크노 음악에 맞춰 모두의 심장을 쿵쾅거리게 합니다.

 

  뜨거웠던 이태원의 밤이 지나고, 철준의 집, 좁은 현관에는 신발들로 미어터집니다. 철준의 방 안에는 신나는 밤을 보낸 친구들이 빼곡하게 드러누워 쿨쿨 잠들어 있습니다. 동갑모임에 처음 나갔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친구들로 집 안을 가득 채운 풍경이 철준에게는 그저 신기하고 행복하기만 합니다. 그 행복이 금세 사라질까 싶은지 쉬이 잠들지 못한 철준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봅니다. 철준은 핸드폰을 켜고 데이팅 어플 자기소개 란에 적어두었던 탈북자 친구 구합니다라는 문구를 삭제합니다. 다음날 아침, 중국집에서 배달시킨 음식들을 펼쳐놓고, 함께 밥을 먹는 풍경 또한 평화롭습니다. 0의 시절, 친구가 되고 싶어 용기 내어 밥 같이 먹자고, 집 앞에 괜찮은 중국집이 있다고, 같이 먹으러 가자고 했지만 종내 가 닿지 못했던 그 말은 철준이 그토록 바라던 꿈이었는데, 어느새 그 꿈이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뜨겁게 타오르던 행복은 어느새 식기 마련이고, 또다시 0이 되는 시간이 찾아옵니다. 하지만 철준의 마음은 전과 같지 않습니다. 꽁꽁 숨어버린 영준의 0을 찾아내 기꺼이 1이 되어주고, 어느 날에는 탈북자 게이 친구를 만나 0이었던 그에게도 다정한 1을 더해줍니다. 이제 더 이상 철준은 0이 되는 걸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출처 : 네이버영화 - 포토 - 스틸컷

 

3671, 3672, 3673,...

 

  종로3가역 6번 출구 저녁 7시의 그곳에서는 0일 수밖에 없던 사람들에게 각자의 첫 순간을 떠올리게 합니다. 0에서 1로 내디딘 용기는 또 하나의 1을 만나 2만큼의 용기가 됩니다.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던 0의 말들이 쏟아져 나오던 순간, 0의 마음을 아는 사람들과 그저 함께 있기만 해도 속이 뻥 뚫리던 순간, 꽁꽁 마음을 숨겨도 종내 가닿고야 마는 그 순간, 3670이었던 우리의 마음은 어느새 3671, 3672, 3673,... 시나브로 늘어갑니다.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처음 이 영화를 보는 동안 펑펑 울진 않았지만, 보는 내내 눈가가 촉촉한 채로 자주 웃었고, 이따금 뭉클했습니다. 썸머프라이드시네마에서 2회차 관람을 하면서는 철준과 영준만이 아닌, 그들을 둘러싼 또 다른 0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학민도 정학도 전도사님도 논술선생님도 이모도 모두에게도 0의 마음으로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나눈 0.1, 0.01의 마음이 차곡차곡 쌓여 철준에게 1이 되어주었다는 사실 또한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영화관을 나서면 영준이 고르고, 철준이 부른 그 노래가 귓가에 맴돌고, 철준의 노래에 맞춰 저도 모르게 추임새를 넣게 됩니. 철준과 영준처럼, 그리고 저처럼 행복하게 이 멋진 영화를 만날 또 다른 0을 위해 기꺼운 마음으로 운을 떼봅니다. “3671”

 

3671

 

 

 


 

 

▷영화정보
감독: 박준호 / 각본: 박준호 /제작 : 박준호 / 제작사: 오롯필름 / 배급사: 엣나인필름 / 개봉일: 2025.09.03 / 러닝타임: 124분 / 배우: 조유현, 김현목, 조대희 / 장르: 퀴어, 멜로, 로맨스
 
 
▶ 영화 <3670>은 CGV, 메가박스, 아트나인, 씨네Q, 씨네큐브 광화문, 아트하우스 모모, 인디스페이스, KU시네마테크, 더숲아트시네마, 아리랑시네센터, 영화의전당, 전주디지털독립영화관, 광주독립영화관 등 극장에서 관람할 수 있습니다.